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웨덴/역사/바사 왕조 (문단 편집) ====== 라드노트 조약의 체결과 에르데이 공국의 참전 ====== 칼 10세 구스타브는 AD 1656년 12월 6일 [[트란실바니아 공국|에르데이 공작]] 지외르지 2세 라코치와 자포로쟈 코사크의 헤트만 [[보흐단 흐멜니츠키]]까지 끌어들여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및 리투아니아 귀족 보구스와프 라지비우와 함께 '라드노트 조약'을 체결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대한 분할 점령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스웨덴의 칼 10세 구스타브가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과 쿠야비, 마조프셰 북부, 사모기티아, 쿠를란트, 인플란티[* 폴란드령 리보니아로 현재 [[라트비아]] [[라트갈레]] 지역.]를 차지하고 보구스와프 라지비우가 리투아니아의 [[나바흐루다크]]를 차지하며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대(大) 폴란드 지방을 차지하기로 했다. 또한 자포로쟈 카자크의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폴란드의 남동부를 차지하며 [[트란실바니아 공국|에르데이 공국]]의 라코치 지외르지 2세가 소(小) 폴란드 지방을 차지하기로 했다. 이제 지외르지 2세 라코치가 AD 1657년 1월부터 [[트란실바니아 공국|에르데이 공국]],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에서 동원한 병력 25,000명과 지원을 온 자포로쟈 카자크 10,000명을 이끌고 폴란드의 남부로 진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AD 1657년 3월 28일 소(小) 폴란드 지방의 중심 도시인 크라쿠프에 도착하여 스웨덴 군으로부터 소유권을 넘겨받았다. 비록 그동안 죄외르지 2세 라코치가 진격 도중에 약탈과 방화를 일삼고 수천명을 학살했기 때문에 [[폴란드인]]의 공분을 샀지만 죄외르지 2세 라코치는 이를 무시하고 크라쿠프에 일부 수비병력만 남겨둔 채 북진하여 4월 12일 츠미에루브에서 칼 10세 구스타브의 스웨덴군과 합류했다. 이에 대항하여 스타니스와프 레베라 포토츠키의 폴란드군과 파베우 얀 사피에하의 리투아니아군이 합류하였고 5월초에는 예르지 세바스티안 루보미르스키가 별동대를 이끌고 복수를 위해 에르데이 공국으로 진군했다. 5월 13일 스웨덴-에르데이 연합군이 [[브레스트(벨라루스)|브레스트]] 요새를 함락시키고 3일간의 포위전 끝에 5월 17일 바르샤바를 재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6월 덴마크가 얀 2세 카지미에시와 동맹을 맺고 갑자기 덴마크가 선전포고를 해왔기 때문에 칼 10세 구스타브가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을 병력을 이끌고 바르샤바를 떠나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